임상, 상담 불문하고 최소한 supervisor라면 이 정도의 역할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정리해 봤습니다.
1. 정확한 지식 전달
임상가들이 수련 과정에서 반드시 익혀야 할 지식과 정보를 그동안 학회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해 두었다면 이미 현장 supervisor들의 애로사항이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만 제가 10년 이상 학회를 지켜본 결과 난망한 일이므로 어쩔 수 없이 각개격파, 구명도생하셔야 합니다. 문제는 수련 현장에 따른 차이가 꽤 크다는 것인데 그나마 많은 환자가 몰리고 정신건강의학과 수련 과정과 접점이 많아 최신 지식을 업데이트할 수 밖에 없는 종합병원급 기관은 일이 많아서 힘들어 죽을지언정 실력은 늘 수 밖에 없습니다. supervisor도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자기계발을 해야 하니까요(물론 그런 기관에서도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시간만 죽이고 앉아 있는 무능한 supervisor도 있습니다만 그건 개인적인 문제이니 여기에서는 논외로 하고요). 예를 들어 최근에 DSM-5가 출시되었는데 번역판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눈치만 보는 건 supervisor의 자세가 아닙니다. DSM-5는 도입 시점이 문제이지 DSM-IV를 계속 쓸 수는 없을테니까요. 그러니 당장 원판을 구입해서 읽고 정리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북 세미나 한답시고 엄한 레지던트 선생님들에게 번역, 정리 맡기는 짓 하지 마시고요.
supervision을 할 때에도 reference가 있는 지식과 자신의 체험에 기반한 지식을 구분해서 전달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자신이 전문가가 되기 이전에 윗 supervisor에게 배웠던 지식만 알음알음 끌어모아서 울궈먹을 수 있거든요. 제가 최근에 제 supervisee 선생님들께 reference를 자주 물어보는데 제대로 답변하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근거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연습이 안 되어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 supervisor들께서는 정확한 지식을 전달하고 그 지식이 항상 업데이트되어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2. 동기 부여
첫 번째 역할로 말씀드린 정확한 지식 전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동기 부여이며, 동기 부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정확한 지식 전달도 요원한 일이 되고 맙니다. 임상, 상담 현장의 일이 재미있고, 호기심이 샘솟으며,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공부하는 게 즐거워야 계속 하고 싶고 그래야 정확한 지식을 습득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게 마련이니까요. 게다가 그렇지 않아도 힘든 수련 과정에서 동기마저 충천하지 않다면 수련 과정을 버티는 것은 물론이고 전문가가 되고 나서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회의에 빠지거나 쉽게 질려서 무력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대개의 경우 supervisee 선생님들에게 동기 부여가 잘 안 되는 건 supervisor 스스로가 동기 부여가 안 되기 때문이고 자신이 하는 일이 재미 없거나 무료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함정에 빠진 supervisor라면 이 문제부터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supervisee들까지 함정에 빠뜨려 공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만 더 첨언하자면 가능하면 동기 부여는 사명감보다는 흥미 유발과 재미 찾기로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생각에 우리나라 임상, 상담 현장은 사명감과 소명 의식만 너무 강조한 나머지 내담자/피검자의 문제를 다룰 때 진지해지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임상가들에게 엄숙주의를 강요하다보니 그렇지 않아도 도제식 수련제도 때문에 힘든 수련 레지던트들에게 복종과 충성을 강요하는 이상한 교조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3. 핵우산 기능
이건 다른 직능 영역과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 곳에서 일하는 supervisor에게만 해당됩니다만 개업 상담센터나 대학 교수가 아닌 이상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일하지 않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대부분의 supervisor에게 해당된다고 해도 맞을 겁니다. 특히 의사 선생님들과 일을 하거나 지시를 받아야 하는 기관의 선생님들은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기관에 속한 supervisor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핵우산 기능합니다. 여러 직종이나 직능의 전문가들이 함께 일하는 기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충돌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의사전달과정이 모호하거나 명령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때로는 똥물이 튀는 것이 싫어서 희생양을 찾아서 떠넘기는 일도 생기게 되고, 업무 진행 상 약한 부서나 조직에 압력을 행사하는 일은 다반사죠. 그런데 그럴 때 자기 하나 살자고 미사일이 날아오는데 옆으로 비켜서거나 의사를 비롯한 다른 직능 전문가의 뒤에 숨는 일만큼은 절대로 하면 안 됩니다. 앞으로 나서서 나 하나만 믿고 의지하는 supervisee들을 위해 산화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뭐 그런다고 supervisor가 잘려나가는 일이 얼마나 되겠어요? 엄살 부리지 마시고요). 유능한 중재자가 못 된다면 최소한 싸움닭이 되는 것 만큼은 피하면 안 됩니다.
수련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수련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여론조사하면 supervisor가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기만 내빼거나 쏟아지는 압력을 몸으로 막아내기는 커녕 완장찬 마름처럼 되려 횡포를 부릴 때가 당당히 1위가 될거라는데 제 금쪽같은 돈 500원을 걸겠습니다.
존경받는 supervisor가 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실력과 성품을 겸비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정확한 지식을 전달하고 동기를 부여하려고 애쓰며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아랫사람들의 안위를 책임지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supervisor의 역할이고요.
오늘도 현장에서 외롭게 고군분투하고 계신 수많은 supervisor 선생님들 힘 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장래의 동반자가 될 supervisee 선생님들이 모두 잠재적인 우군이니까요. 그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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